비에 젖은 채로 다시 사랑하는 법
『여름의 빌라』, 백수린
장마 전선이 도시 위에 며칠째 머무를 거라고 합니다. 우산을 써도 옷자락은 젖고, 창밖 풍경은 뿌얘져 누군가 오래된 사진 위에 입김을 불어놓은 것 같아요. 이런 축축한 여름밤이면 저는 백수린 작가의 문장들이 생각납니다. 화려한 수식 없이도 마음을 베는 문장들 덕분에, 『여름의 빌라』는 제가 가장 애정하는 책이 되었어요.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여름의 빌라』 속 「시간의 궤적」입니다. 스물여덟에 연인과 헤어진 주인공은 미술사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언니와, 언니 곁의 프랑스인 브리스를 만나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거듭한 끝에, 그 땅에 남아 브리스와 가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백수린은 이를 해피엔딩으로 그리지 않고, 한참 후에야 주인공은 그때 보지 못했던 언니의 진심과 외면했던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들이 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길을 내며 흐르고 있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줍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 지난 여름들을 떠올렸어요. 영원할 거라 약속했던 관계, 다시는 식지 않을 것 같았던 뜨거움. 그 자국도 시간이 지나며 흐려졌습니다. 한 때는 선명했고, 제 감정에 큰 확신이 있었지만 어느새 만져야만 겨우 알아볼 수 있고, 미쳐 보지 못했던 구석들이 참 많았던 어린 흔적들이었던거죠.
이런 생각 끝에 닿는 건 결국 '언어'의 문제입니다. 좋은 글이란 아름다운 단어를 골라 쓰기보다 평범한 말 하나를 오래 매만져, 되돌아보아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는 문장을 좋아해요. 사람과 사람이 오래 마음을 부비면 모서리가 둥글게 닳는데, 그 순간이 사랑이라면 먼저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죠. 감정도 다르지 않아서, 한순간 달아올랐다 식는 마음보다 부대끼며 천천히 바뀐 감정이 다시 일어설 힘이 됩니다.
이런 기다림을 이유로, 저는 백수린이라는 작가를 오래도록 좋아해왔어요. 감정을 서둘러 발설하지 않고, 그것이 가라앉아 슬픔이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시선이 좋았거든요. 그러니 이 비 오는 여름에는 『여름의 빌라』를, 그중에서도 「시간의 궤적」을 펼쳐보시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책 속에 가만히 가라앉아보세요. 흐려진 자국 속에서도 우리는 결국 다시 사랑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이 천천히 알려줄 거예요. 장마가 그치고 나면, 어쩌면 마음에도 작은 자국 하나가 새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